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회담 (문단 편집) === 3국 수뇌들의 도착 === 회담 준비를 전적으로 준비했던 영국은 카이로에서 회담하는 것이 결정되자 주 이집트 영국대사관을 통해 구체적인 회담 장소 물색에 들어갔다. 회담 장소는 카이로 시내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메나하우스 호텔로 결정되었고 호텔 본관에서 회담이 진행하기로 되었다. 각국 정상과 그 수행원들은 주변 별장에서 투숙하기로 결정되었다. 메나하우스 호텔 수비를 위해 보병 1개 여단과 500개의 대공포가 준비되었다. 루이스 홀리스가 접대와 경계 업무를 맡았다. 1943년 11월 11일, 미국 측이 가장 먼저 출발했으며 가장 늦은 11월 22일 오전 9시에 도착했다. 영국은 11월 12일 출발해 11월 21일 오후 3시에 도착하였다. 중국 측은 가장 늦은 11월 18일 출발했는데 이는 국민정부 주석 [[린썬]]이 사망함으로 11월 17일에 린썬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장제스가 거기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가장 빠른 11월 21일 오전 7시에 카이로에 도착하였다. 회담 직전, 루스벨트가 독일군의 공습을 우려하여 회담 장소를 카이로에서 수단의 카르툼으로 교체하는 것이 어떻냐고 처칠에게 제안하였으나 처칠은 회담 장소에 대한 영국의 방위를 확신했으므로 11월 21일에 카이로에서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회답했다. 제일 먼저 카이로에 도착해 휴식하던 장제스에게 주 이집트 영국 대사가 찾아와 처칠이 카이로에 도착했으며 5시 30분에 그를 방문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이에 장제스는 주인이 손님을 찾는게 아니라 손님이 주인을 찾는 것이 예의라고 고집하여 직접 처칠을 만나러 갔다. 처칠과 장제스의 회견은 30분 동안 지속되었고 서로 여행 경로와 소요 시간을 적은 쪽지를 교환했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이집트의 역사는 6천년인데 중국의 역사는 어느 정도 되냐고 물었다. 장제스는 4600년이라고 대답했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스탈린을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장제스는 없다고 했다. 이어 처칠이 소련이 곧 대일전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는데 장제스에게 이에 대해 찬성하냐고 물었고 장제스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처칠은 이번엔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약화되고 있는 조짐이 보이느냐고 하자 장제스는 공중전에서는 그렇다고 했다. 장제스가 던진 질문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독일에서 내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였다. 처칠은 이에 대해 보수적으로 추정하며 게슈타포는 효율적이고 나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도 답변했으나 연합국의 공습으로 독일인들의 생활 여건이 열악해졌다고 했다. 처칠은 장제스와의 회견에서 '이번에 나는 장제스를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그의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한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고 장제스는 '처칠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일찍이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보다 좋았다.'고 1943년 11월 21일자 일기에 썼다. 11월 22일 처칠이 장제스를 답방했고 쑹메이링의 안질에 대해 문안하며 자신의 주치의를 보내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처칠은 자신의 대표단에 400명의 전문가가 있으며 중국은 물론 인도에 관해서도 광범위한 주제로 토론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처칠은 자신의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서 장제스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침착하고, 겸손하며, 유능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로서는 그때가 권력과 명성을 최고로 누리던 시점이었다. 미국인들의 눈에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비쳤다. 그는 "새 아시아"의 투사였다. 일본 침략에 맞선 견고한 방패였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미국 정계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가 세계 네번째 열강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전망과 평가는 훗날 모든 사람들이 내팽개쳐버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장제스의 권력이나 중국의 장래성 평가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당시 중국의 총통이 그와 같은 자신에 대한 광범위한 명성을 드높이게 된 공동의 대의에 대해서 여전히 공헌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뒤에 [[마오쩌둥|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국공내전|조국에서]] [[국부천대|쫓겨났다.]] 아주 애석한 일이었다. 이제 [[장제스|총통]]과 [[쑹메이링|그의 아내]]는 이전에 그를 찬미했던 자들로부터 부정부패의 반동주의자로 간주되지만, 나는 그 기념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